성도의 영성은 현실을, 육체성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을 붙잡는 것이다 - 가바르니종교는 반드시 문화라는 옷을 입게 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문화는 민족의 종교의 구체화이다 -엘리옷
구원받은 한 사람이 사회전체의 문화보다 더 중요하다 - 스킬더
'하나님께서 일상을 통해 더 고상한 것들을 가르치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 빈센트의 런던에서의 설교 중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 가장 상식적인 사람들
위로한답시고 사생활에 깊이 개입하려는 것이야말로 폭력에 다름없다
자신이 동정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결코 위로받지 못한다
1850년대 중반 유럽에 불기 시작한 일본 열풍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많은 인상파화가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프랑스의 일본인들이라고 부를 정도
'어떤 면에서 나의 모든 작품은 일본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빈센트
중세의 신 절대주의에 대항하다 보니 서양 근세는 또다른 절대주의인 인간 절대주의 그 중에서도 자아 절대주의로 치우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자연중심주의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
그가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영원한 복음을 덧없이 사라지는 이 세상사를 표현할 계시와 같은 힌트를 일본판화들을 통해 얻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자신을 결정하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 우리를 결정한다 밑도 끝도 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헤매기보다는 먼저 의식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하겠다
'나의 유일한 걱정은 내가 어떻게 하면 세상에 유익을 줄 수 있는가이다..'
자기반성없는 관계론적인 논의가 배제된 사상은 근본적으로 자기순환론적일 수 밖에 없다
나르시시즘적 콤플렉스를 벗어날 수 있는 길 - 자신을 타자화
자신의 타자성을 인식하는 근본적인 계기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가능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야만 자신을 알고 자신을 알아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 칼빈 <기독교강요>
빈센트는 덧없는 것에서 허망함 절망이 아니라 도리어 희망과 영원을 느꼈다
- <씨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은 그에게 죽음과 영원 덧없음과 무한에 대한 분명한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자연에서 초자연을 본 것이다
모든 종교는 무한과 영생을 교리화했다 진정한 생명과의 접촉이 아니고서 어떻게 영생과 무한을 맛볼 수 있겠는가
화가는 자연에 나타난 신성을 환기시키는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 것.
설교자는 말로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만 화가는 그림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왜 모든 사람이 보지 못하는 지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자연과 하나님은 귀와 눈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계속 보여주는데 말이야.'
빈센트가 생각한 무한과 영원은 철저하게 인격적인 그 무엇이었다
우리는 운명 속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바로 그 무한과 영원 속에 발걸음을 내디딘 존재다. 덧없음에 대한 인식은 도리어 현실을 긍정하게 만든다.
그 모든 덧없음이 영원을 향해 열려 있는.
빈센트는 렘브란트 속에 복음이 있고 복음 속에 렘브란트가 있다는 말까지 한다. 복음을 말로 글로도 그림으로도 전할 수 있다고 본 것
그리스도야 말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예술가는 만물에 내제한 하나님의 형상을 그려낸다는 의미에서 선택받은 자들
다른교회와 달라지려는 몸부림이야 말로 가장 교회답지 않는 몸짓이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용서는 짓밟힌 제비꽃이 구두발에 남긴 향기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됨됨이는 떠난 뒤에 비로소 드러난다
빈센트는 실재를 묘사하면서도 사실적이 아닌 상징적으로 그렸다
'실재는 동시에 상징적이다'라는 표현을 즐곧 사용한다
고갱은 실재 세계를 환상의 세계인양 그렸다
성자가 인간이 되셔도 하나님이기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처럼 되라고 말한다(선악과) 하나님적인 존재인데 다른 그 어떤 하나님처럼 되라는 말인가? 시편82:6
현실에 매몰되지 말되 도피하지 않는 길은 현실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를 증거할 수 없다면 더 이상 기독교는 세상에 아무런 매력을 줄 수 없을 뿐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도 잃게 될 것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나님께 불편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어 놓는 것
불평이 감사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솔직히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
빈센트가 자주 인용한 성경구절처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고린도후서 6:10)' 사람이 바로 빈센트였다 그는 해바라기를 통해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관계와 기쁨과 슬픔의 변증법적인 관계도 본것이다.
<해바라기>
빈센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실재에서 유리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실재를 희생하면서까지 상상에 자신을 맡기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실제로 실재가 있음을 믿었는데, 그에게 그림은 실재의 성육신, 곧 실제의 상징화였다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보는 세계관이 새롭게 형성되었다는 것
기독교 예술은 기독교적으로 하는 예술
주제에 의해 기독교 예술과 세속예술이 나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에술을 하느냐의 문제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면 세속적?
종교적인 주제로 그렸지만 반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그림이 수없이 많다
빈센트는 일상적인 삶의 주제로 신적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보이려 했다
그림 자체가 너무 직설적이면 깊이 스며들기 힘들다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_고갱
빈센트는 상징의 세계 속으로 깊이 스며들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원했다
올리브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도 예수님을 연상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는 법.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연상작용을 알고 있었다
빈센트는 모든 그림이야 말로 실재를 상징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논리학자, 히브리인들은 심리학자
히브리적 사고는 눈으로 보는 것의 이면을 더듬어 듣고 느끼면서 삶을 경험했다 믿음도 마찬가지.
성경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 단지 믿음의 예를 통해 믿음의 실체를 재구성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설명 못한다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삶은 본질적은 것들은 실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순간 그냥 흩어져 사라져버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확신은 다 알고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잘 몰라도 순종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성도들은 다 아는체 하는 자들이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시인할 수 있는 자들이다. 아프게 꽉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느슨하게 쥐고 있는 사람처럼.
당시 인상파의 그림주제가 너무나 평범한 것이었기에 일반들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빈센트는 그림에서 자신의 인상정도가 전달되기를 원한 것 이 아니었다.
'내가 인물하나 풍경화에서 표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감성적이며 우울한 요소가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란다.'
경건은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짊어지고 가는 능력에 있다
남에게는 형편없이 무기력하게 보여도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의심의 문제와 계속 싸워가면서 끝까지 소망을 놓지 않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다.
내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나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
성도는 세상으로 다시금 보내기 위해 세상에서 불러내셨다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으니 세상으로 들어가야.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이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에 다 누리지 않고 다 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길이다.
성도는 아무런 방어없이 무력하게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신이기를 그만둘 때 악마이기를 그만둔다.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없이는 아예 불가능하다.
과도한 단순화야말로 문제를 얼마나 복잡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문제와 인생의 복잡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출발점.
자신의 문제를 단순화하기위해 거쳐야 하는 복잡한 과정 하나하나를 인내하면서 겪지 않은 사람들의 단순함이야 말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현대인의 고독은 다른 이들과 교류하지 못하는 외로움에 기인한다
고독이 무의미하지 않으려면 고뇌로 나아가야 한다
정직한 고뇌는 사회전체를 품을 수 있는 힘이 된다
의문과 의혹을 거치지 않은 신앙을 참된 신앙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삶의 무상함을 절감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
<까마귀가 나는 밀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