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이란 사물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이며 인간은 세계관이 제공하는 방향감각이나 인도기능 없이는 살 수 없다. 결국 인간행동의 결정적인 요인은 세계관의 문제인데 성경의 핵심목적인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계관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만 한다.
세계관은 성경적이든 비성경적이든 간에 지혜나 상식 즉, 비과학적 전과학적인 더 기본적인 인식차원이다. 철학이 구조에, 신학은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비해 세계관은 구조와 방향 모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학문의 특징인 초점의 분화가 없다, 개혁주의적 세계관 역시 거룩한 영역과 세속영역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통합적인 조망인 것이다.
창조는 주권적인 행위(만들고 다스림)와 창조질서(창조의 산물)의 상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행위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행위전체로 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매 순간 붙들고 계시는 보존과 만드신 그 복종자인 우주와의 관계로, 물리적인 것을 넘어 인간 전 존재와 행위 제도 등 자연적 생활도 전적으로 피조적이다. 불변하는 그 법은 넓은 범위에서는 태초부터의 하나님의 계획이라 할 수 있다. 법은 통치방식에 따라 직접적이고 강제성이 있는 자연법과 인격적인 책임이 있는 매개자인 사람을 통해 정의를 실천, 실정하는 규범으로 나눌 수 있다. 또는 다른 기준으로 모든 장소, 사람, 시간에서 조건이 맞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일반법과 소명 인도와 같은 개별적. 보편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법으로 나눌 수 있다.
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천지를 창조 곧, 무에서 유의 창조인 제 1창조와 그 채워져야 할 모양이 주어지지 않은 혼돈과 공허에 질서를 부여하고 정교화와 완성화인 엿새 동안의 제 2창조로 구분된다. 앞의 두 창조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행하신 것이라면 제 3창조는 대리인으로서 사명인 경작-인간에 의한 땅의 사회적 문화적 발전으로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 문화명령(창조명령)은 전 역사에 근본적으로 중요한데 창조의 모체 안에서 숨겨져 있는 가능성들을 대대로 드러내고 개발하는 과정을 통한 창조의 개발이다.
인간은 일반 계시를 통해 규범을 직관적으로 동조하는 감각인 양심과 지혜로 분명히 알고 보지만 왜곡하여 듣는데 알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아는 영적 분별력과 이해력의 은사가 필요하다. 언어를 통한 특별 계시인 성경말씀의 빛 속에서 만이 창조계의 규범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그것을 대신 이행해주셨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스스로 시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법은 자유의 조건으로 창조주의 선한 법에 대한 인류의 반란이 곤경의 원인이다. 범죄이전에 창조계는 명백히 선했으나 인류가 더럽혔을 때 폐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 그것을 회복하신다. 죄에의 속박과 타락은 창조계 전체의 대재난을 의미하지만 창조의 부분이 아니며 침범과 독선의 성격으로 지상적 창조계에 기생하는 것이다. 결혼 국가 문화생활 학문 등 반규범, 악, 왜곡, 병을 경험하는 어느 곳에서나 선한 창조계의 왜곡이 있는데 그리스도안에서 해방도 창조계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다.
개혁적 세계관의 실천적 함의를 위해선 구조와 방향의 구별이 필요한데 먼저 구조는 본질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창조명령인 법으로 그 존재와 영향력은 제거될 수 없으며 모든 상황과 조건들이 창조의 가능성에 참여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죄는 창조계의 신실성을 무효화하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반(보존)은총은 특별은총의 구원 바깥에서도 창조계를 보존한다. 방향은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변질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 즉, 규례로부터의 일탈 혹은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부정적 의미로서 언급되는 ‘세상’의 의미는 죄에 의해 오염된 부패한 땅 그리스도 밖의 구원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뜻한다. ‘세상’외에도 허망, 부패, 속박 등 그를 뜻하는 여러 가지 적절한 단어의 사용이 필요한데 교회의 '거룩'한 영역 밖의 것은 '세속, 세상적’이라는 방향에 따른 구분이 아닌 창조의 위치에 의한 규정은 영지주의의 희생물로서 잘못된 것이다. 창조계의 부패는 인간의 죄와 피조물인 마귀에게 노예 됨의 결과로 지상과 지상의 상태는 인간의 책임이다.
성경에서 구원을 표현하는 낱말들은 모두 손상되지 않은 창조계의 선한 상태로의 회복을 함축하는데 포기하지 않으시고 본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시는 구원은 죄의 모든 영향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것이 아닌 생명과 생동감을 불어넣어 완전하게 하는 은혜이다.
죄와 구속은 전체주의적 성격으로 중립적인 것이 없는데 인류는 창조계의 모든 구역에서 새롭게 하는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기본적 성경적 개념의 적용 가능성은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나라’란 왕권, 주권, 통치, 지배 등, 역동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이며 예수님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왕권과 그 나라의 도래를 효과적으로 증시하고 입증하셨다. 즉, 초림은 창조계 안에 발판을 세우신 것이며 재림은 주권의 완전한 승리인데 그 중간 기에는 인간에게 그 분의 주권선양과 나라확장을 위한 부르심이 있다. 창조계에의 권리주장의 대립은 두 영역 사이가 아닌 두 통치 사이로 전체, 전인격에 걸쳐 죄로부터 자유함이 필요한 모든 곳이 해당된다.
개혁은 성별-신성한 것과의 외적인 연관이 아닌 성화sanctification로 구조에 침투하여 내부로부터의 갱신이 활동 전 영역에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그로 인해 거룩은 성도 삶의 전 영역의 특징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개혁은 주어진 것을 출발점으로 하며 전통과 권위, 기존질서를 갱신을 위한 손잡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고 그 역사의 연속성을 긍정하는데 단순히 이들을 부정적 의미의 세상과 동일시하여 도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각 제도의 구별된 책임, 즉 영역주권에 의한 권위들은 하나님에 의해 나란히 배분된 것으로 실정은 창조적 규범을 현실화한다. 창조적 구도의 왜곡은 주어진 영역 안에서의 왜곡 또는 한 영역의 권위를 다른 영역에 까지 확대하는 경우이다.
영적인 분별력과 인간성에 관한 성숙한 통찰력에 맡겨지는 ‘회색지대’에서도 성경이 최우선의 안내자이다. 성경은 대답보다 신뢰할 만한 지침이 되는 기초변수를 제공하여 적절한 질문제기를 유도한다. 창조계를 인정하는 맥락에서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격렬한 개혁과 성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식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계관은 철학적 범주를 매개로 하여 학문에 영향을 미치므로 개혁주의 세계관은 개혁주의 철학을 요구한다. 어느 영역에서의 책임을 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든지 성경적 세계관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창조-타락-구속의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와 원래 선했던 창조계를 알게 되어 나 스스로도 역시 괴롭게 했던 삶의 곤경에 대해 하나님께 핑계나 원망하려는 습성이 스스로 잘못됐음을 어느 때보다 분명히 인지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소모적인 사고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 선한 창조계의 회복을 위한 주님의 십자가를 구속의 의미가 더욱 깊이 알아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범위와 개념의 이해가 확장되어서 우리에게 주신 문화명령에 대한 거룩한 야심과 책임감이 더욱 느껴진다. 스스로의 세계관을 점검하는 것은 곧 실질적인 성화라는 것을 배웠다.
세계관은 성경적이든 비성경적이든 간에 지혜나 상식 즉, 비과학적 전과학적인 더 기본적인 인식차원이다. 철학이 구조에, 신학은 방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비해 세계관은 구조와 방향 모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학문의 특징인 초점의 분화가 없다, 개혁주의적 세계관 역시 거룩한 영역과 세속영역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는 통합적인 조망인 것이다.
창조는 주권적인 행위(만들고 다스림)와 창조질서(창조의 산물)의 상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행위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행위전체로 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매 순간 붙들고 계시는 보존과 만드신 그 복종자인 우주와의 관계로, 물리적인 것을 넘어 인간 전 존재와 행위 제도 등 자연적 생활도 전적으로 피조적이다. 불변하는 그 법은 넓은 범위에서는 태초부터의 하나님의 계획이라 할 수 있다. 법은 통치방식에 따라 직접적이고 강제성이 있는 자연법과 인격적인 책임이 있는 매개자인 사람을 통해 정의를 실천, 실정하는 규범으로 나눌 수 있다. 또는 다른 기준으로 모든 장소, 사람, 시간에서 조건이 맞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일반법과 소명 인도와 같은 개별적. 보편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법으로 나눌 수 있다.
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천지를 창조 곧, 무에서 유의 창조인 제 1창조와 그 채워져야 할 모양이 주어지지 않은 혼돈과 공허에 질서를 부여하고 정교화와 완성화인 엿새 동안의 제 2창조로 구분된다. 앞의 두 창조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행하신 것이라면 제 3창조는 대리인으로서 사명인 경작-인간에 의한 땅의 사회적 문화적 발전으로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 문화명령(창조명령)은 전 역사에 근본적으로 중요한데 창조의 모체 안에서 숨겨져 있는 가능성들을 대대로 드러내고 개발하는 과정을 통한 창조의 개발이다.
인간은 일반 계시를 통해 규범을 직관적으로 동조하는 감각인 양심과 지혜로 분명히 알고 보지만 왜곡하여 듣는데 알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아는 영적 분별력과 이해력의 은사가 필요하다. 언어를 통한 특별 계시인 성경말씀의 빛 속에서 만이 창조계의 규범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그것을 대신 이행해주셨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스스로 시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법은 자유의 조건으로 창조주의 선한 법에 대한 인류의 반란이 곤경의 원인이다. 범죄이전에 창조계는 명백히 선했으나 인류가 더럽혔을 때 폐기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 그것을 회복하신다. 죄에의 속박과 타락은 창조계 전체의 대재난을 의미하지만 창조의 부분이 아니며 침범과 독선의 성격으로 지상적 창조계에 기생하는 것이다. 결혼 국가 문화생활 학문 등 반규범, 악, 왜곡, 병을 경험하는 어느 곳에서나 선한 창조계의 왜곡이 있는데 그리스도안에서 해방도 창조계 전체가 참여하는 것이다.
개혁적 세계관의 실천적 함의를 위해선 구조와 방향의 구별이 필요한데 먼저 구조는 본질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창조명령인 법으로 그 존재와 영향력은 제거될 수 없으며 모든 상황과 조건들이 창조의 가능성에 참여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죄는 창조계의 신실성을 무효화하거나 파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반(보존)은총은 특별은총의 구원 바깥에서도 창조계를 보존한다. 방향은 타락으로 인한 창조의 왜곡변질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구속과 회복 즉, 규례로부터의 일탈 혹은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부정적 의미로서 언급되는 ‘세상’의 의미는 죄에 의해 오염된 부패한 땅 그리스도 밖의 구원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뜻한다. ‘세상’외에도 허망, 부패, 속박 등 그를 뜻하는 여러 가지 적절한 단어의 사용이 필요한데 교회의 '거룩'한 영역 밖의 것은 '세속, 세상적’이라는 방향에 따른 구분이 아닌 창조의 위치에 의한 규정은 영지주의의 희생물로서 잘못된 것이다. 창조계의 부패는 인간의 죄와 피조물인 마귀에게 노예 됨의 결과로 지상과 지상의 상태는 인간의 책임이다.
성경에서 구원을 표현하는 낱말들은 모두 손상되지 않은 창조계의 선한 상태로의 회복을 함축하는데 포기하지 않으시고 본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시는 구원은 죄의 모든 영향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것이 아닌 생명과 생동감을 불어넣어 완전하게 하는 은혜이다.
죄와 구속은 전체주의적 성격으로 중립적인 것이 없는데 인류는 창조계의 모든 구역에서 새롭게 하는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기본적 성경적 개념의 적용 가능성은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나라’란 왕권, 주권, 통치, 지배 등, 역동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이며 예수님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왕권과 그 나라의 도래를 효과적으로 증시하고 입증하셨다. 즉, 초림은 창조계 안에 발판을 세우신 것이며 재림은 주권의 완전한 승리인데 그 중간 기에는 인간에게 그 분의 주권선양과 나라확장을 위한 부르심이 있다. 창조계에의 권리주장의 대립은 두 영역 사이가 아닌 두 통치 사이로 전체, 전인격에 걸쳐 죄로부터 자유함이 필요한 모든 곳이 해당된다.
개혁은 성별-신성한 것과의 외적인 연관이 아닌 성화sanctification로 구조에 침투하여 내부로부터의 갱신이 활동 전 영역에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점진적인 과정으로 그로 인해 거룩은 성도 삶의 전 영역의 특징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개혁은 주어진 것을 출발점으로 하며 전통과 권위, 기존질서를 갱신을 위한 손잡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고 그 역사의 연속성을 긍정하는데 단순히 이들을 부정적 의미의 세상과 동일시하여 도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각 제도의 구별된 책임, 즉 영역주권에 의한 권위들은 하나님에 의해 나란히 배분된 것으로 실정은 창조적 규범을 현실화한다. 창조적 구도의 왜곡은 주어진 영역 안에서의 왜곡 또는 한 영역의 권위를 다른 영역에 까지 확대하는 경우이다.
영적인 분별력과 인간성에 관한 성숙한 통찰력에 맡겨지는 ‘회색지대’에서도 성경이 최우선의 안내자이다. 성경은 대답보다 신뢰할 만한 지침이 되는 기초변수를 제공하여 적절한 질문제기를 유도한다. 창조계를 인정하는 맥락에서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격렬한 개혁과 성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의식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계관은 철학적 범주를 매개로 하여 학문에 영향을 미치므로 개혁주의 세계관은 개혁주의 철학을 요구한다. 어느 영역에서의 책임을 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든지 성경적 세계관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창조-타락-구속의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와 원래 선했던 창조계를 알게 되어 나 스스로도 역시 괴롭게 했던 삶의 곤경에 대해 하나님께 핑계나 원망하려는 습성이 스스로 잘못됐음을 어느 때보다 분명히 인지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소모적인 사고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 선한 창조계의 회복을 위한 주님의 십자가를 구속의 의미가 더욱 깊이 알아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범위와 개념의 이해가 확장되어서 우리에게 주신 문화명령에 대한 거룩한 야심과 책임감이 더욱 느껴진다. 스스로의 세계관을 점검하는 것은 곧 실질적인 성화라는 것을 배웠다.